낯설면 어때, 여기도 강릉이래요
승인 2021. 08. 17 07:10강릉 지도를 펼칠 때까지 알지 못했다.
정동진·금진해변 등이 강릉이라는 사실을.
이번엔 반대로 한 걸음 위로 올라갔다.
주문진과 사천이 기다리는 북쪽으로.
강원도와 강릉을 숱하게 갔지만, 어떤 곳을 가더라도 어느 지역에 속해 있는지 굳이 알아보며 다니진 않았다. 남쪽이든 북쪽이든 상관없이 말이다. 그런데 어느 날, 잘 보지도 않던 강릉관광 지도에 무심코 손이 나갔다. 정동진과 금진해변 등도 다 강릉시에 속한 것을 알게 됐다. 지명과 지리를 몰라도 여행만 잘하면 되니 그냥 넘어가려 했지만, 강릉을 다시 보게 됐다. 조금 더 많은 여행의 이야기를 담고 있을 것 같기 때문이다. 이번엔 강릉의 북쪽 주문진과 사천리로 향했다.
주문진항의 새벽을 상상하며
강원도는 자동차를 이용해 여행하는 게 훨씬 더 수월하지만, 때로는 조금 불편한 대중교통을 이용하기도 한다. 느긋하게 더 많이 걸으면 사소한 부분까지 눈에 담을 수 있으니 말이다. 강릉터미널에서 주문진까지도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주문진 터미널에 도착하면 벌써 조금의 바다 짠 내가 느껴지는 것 같다. 동해와 가까워진 셈이다.
한 번쯤은 새벽에 찾고 싶은 주문진항을 여행의 시작점으로 삼았다. 강릉 어업의 중심지이자 ‘오징어’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곳이다. 입구에 대형 오징어 동상도 이를 뒷받침한다. 새벽일을 마친 주문진항의 아침은 매우 고요하다. 무언가를 놓친 사람처럼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동이 트기 전 바삐 움직이는 주문진항의 새벽을 상상해본다.
아침부터 꽤 걸었더니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난다. 식당을 찾을 순간이다. 원래 주문진은 오징어회로 유명한데, 장치찜 등 매콤한 찜 요리도 놓칠 수 없는 별미다. 그 매콤함이 아침에 조금 부담스러울 수도 있지만, 한국인의 DNA는 그렇지 않다. 쫄깃한 장치와 부드러운 감자, 매운맛이 만나 또 다른 밥도둑 메뉴임을 알게 될 것이다.
주문진항과 시장을 뒤로한 채, 이제 도깨비를 만나러 간다. 주문진 바다 근처 한없이 평범한 방파제가 몇 개 있는데, 유독 한 곳에 사람이 붐빈다. tvN 드라마 <도깨비>를 통해 주문진 최고의 포토스폿이 된 이름 없는 방파제다. 드라마가 끝난 지 몇 년이 지났음에도 주문진을 찾은 이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고 있다. 주인공처럼 한 컷 찍으려 했으나 시청자의 마음으로 한걸음 물러 방파제만 사진으로 남겼다.
주문진 투어를 마치고 사천리로 넘어가기 전 독특한 음식을 맛보는 것도 좋다. 서울에서 쉽게 찾을 수 없는 메뉴인데, 연곡면에 있는 ‘연곡꾹저구탕’이 그 주인공이다. 꾹저구는 아주 작은 생선인데, 강물이 바다로 들어가 바닷물과 서로 섞이는 기수역이나 호수 같은 곳에서 잡힌다고 한다. 꾹저구탕은 음식명 그대로 꾹저구로 끓인 얼큰한 매운탕으로, 포슬포슬하고 쫀득한 감자밥과 함께 먹으면 찐 강릉의 맛을 느낄 수 있다. 낯선 음식이지만 한국인이라면 분명 좋아할 맛이다. 부족한 느낌이라면 메밀전이나 감자송편을 곁들이는 것도 좋다.
미처 닿지 못한 비밀의 해변
주문진과 비교해 사천리의 사천진 해수욕장은 아는 사람만 안다. 동해안의 주요 명소들 사이에 끼여 존재감은 그리 크지 않다. 하지만 천천히 거닐면 이곳 나름의 매력을 발견할 수 있다. 날씨가 한없이 맑은 평일, 이 얕은 해변은 조용하기 이를 데 없다. 간혹 들리는 파도 소리를 제외하면 소리를 0으로 해둔 TV와 같다, 즉, 어떤 방해도 없이 이 넓은 바다를 온전히 내 것처럼 누릴 수 있다.
심심한 이 해변에 포인트를 주는 건, 바위섬과 교문암이다. 연곡해수욕장부터 걸어온 터라 사천진 해수욕장에서 맨 처음 발견한 바위섬을 보고 ‘약간 생뚱맞다’는 생각을 했다. ‘저게 왜 여기에?’라는 생각을 한참 하며 가까이 갔는데, 이게 웬걸 바위섬에 닿을 수 있도록 다리까지 놓여 있다. 헤엄치지 않고 걸어서 바위섬에 입도하면 바다와 좀 더 가까워진다. 아주 짧은 거리임에도 뭔가 세상의 끝을 발견한 기분을 느꼈다고 하면 ‘과장이 심하다’라고 핀잔을 줄수도 있지만, 한적한 사천진 해변에서는 대단한 발견이다. 가장 높은 지점에 앉아 차가운 바닷바람을 맞으며 탐험가 놀이를 잠시 했다.
옆으로 자리를 옮기면 또 산만한 바위가 눈길을 끈다. 이름도 있다. ‘교문암’이라고 불리는 이 큰바위는 늙은 교룡(머리에 흰 혹이 있는 전설의 용)과 얽혀 있다. 연산군 7년(1,501년) 가을, 늙은 교룡이 옛 교산의 구릉과 사천의 시내가 나란히 바다로 들어가는 백사장의 큰바위를 깨뜨렸다고 한다. 두 동강으로 깨진 바위가 마치 문과 같이 생겨 후세 사람들이 교문암으로 불렀다고 한다. 바위섬과 교문암 모두 사천진 해변의 한적함과 대비되는 판타지 느낌이 있다.
이밖에도 사천진 해수욕장 주위로 다양한 포토스폿도 있다. 오랜만에 인터넷 검색을 해보니 요즘에는 이곳에서 차박을 즐기는 관광객도 많아졌다. 깊은 밤, 트렁크를 열고 파도 소리를 듣는 모습을 상상하니 내 즐거움을 뺏은 마냥 샘이 난다. 어쩌면 사천진이 또 한 번 오라는 손짓을 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글·사진 이성균 기자